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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0년간 걸어온평화통일
일념의 여정
'일념, 평화통일 길'중에서
한민족의 염원이었던 광복을 맞이하기 1년여 전 일본에서 태어난 나에게 분단 극복과 평화통일은 어쩌면 하늘이 준 숙명이었는지도 모른다. 국제정치학자가 되기 위해 선택한 미국 유학 시절, Peter Wiles 교수와 John Herz 교수를 만난 것은 한국인이었던 내가 북한 문제에 천착할 수밖에 없었던 결정적인 계기였다. 유학을 마치고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1971년 경남대와 인연을 맺게 되고, ‘7.4 남북공동성명’의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1972년 9월 1일 북한 · 통일 문제를 전문적으로 연구하기 위해 경남대 통한문제연구소를 설립했다. 6개월 뒤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로 개칭하고, 2대 소장에 취임했다. 이 때부터 우리의 문제이지만 국제적 냉전체제와 이에 따른 반공 이데올로기 등으로 인한 엄혹한 환경 속에서 연구하기 쉽지 않았던 북한 · 통일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농군의 심정으로 1973년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첫 한반도문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고, 북한 ·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와 한반도, 핵확산, 동남아, 해양 문제 등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주제들에 대해 국내외에서 국제학술회의, 세미나, 워크샵 등을 개최하며 많은 전문가들과 논의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의 연구자들뿐 아니라 해외의 많은 국제정치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다. 국제적인 냉전체제가 종말로 향하던 1986년, 당시 우리와 수교도 이뤄지지 않았던 중국을 방문해 한국 대학생들의 ‘공산권 체험 교육’ 프로그램을 합의하고 추진했다. 1989년에도 수교 이전이었던 소련에 들어가 ‘공산권 체험 교육’ 프로그램 실시 및 동방학연구소와의 MOU 체결 등을 성사시켰다. 주위에서 무모하다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 과정이 평화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믿으며 정면 돌파했다.
냉전체제 해체 후 소련, 중국 등과의 교류 · 협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으며, 198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북한학과를 경남대 행정대학원 내에 개설했다. 이를 모태로 1998년에는 국내 최초의 북한 전문 대학원인 경남대 북한대학원을 개설했다. 이는 다시 2004년 국내 최초의 북한 전문 ‘북한대학원대학교’로 승격 · 독립했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 ‘북한학’을 제대로 된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시킬 수 있었다. 경남대 행정대학원 북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대학원대학교 출신(석박사 학위취득자 668명, 통일미래최고위과정 3,185명, 통일경제아카데미 1,560명 배출)들이 현재 정· 관· 학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평화통일의 길을 함께 개척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996년에는 경남대 개교 50주년 기념사업 가운데 하나로 일본에서 보관하고 있던 소위 ‘데라우치 문고’를 국내로 반환하는 사업을 추진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테라우치 문고는 2010년 문고 전체가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 가운데 ‘기원첩’은 우리나라 보물 1682호로 지정되었다. 한일관계 개선은 학술 · 문화 교류라는 토대가 만들어지고 신뢰가 축적될 때 상호 어려운 역사 · 영토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데라우치 문고의 반환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1998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김책공업종합대학과 협력 의향서를 체결하고,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해 교류 ·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이 모든 것이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정착, 평화통일로 가는 관문이라고 생각하며 지칠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이런 발걸음이 인정받았는지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에 임명됐다.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을 총괄하는 통일부 장관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던 분단 이래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나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반대하던 야당을 비롯해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화해 · 협력정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설명하고,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협조를 당부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을 맡아 밤을 낮삼아 일하며 치밀하게 준비했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고, 평양 순안공항에 발걸음을 내디뎠던 순간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00년 6월 14일 있었던 만찬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 금강산관광, 이산가족 문제, 경의선 연결 문제 등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2000년 6월 15일에는 당시 북한의 2인자이자 환송 오찬 주최자였던 조명록 총정치국장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북한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서 남북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에 착수했다. 전직 대통령과 3부 요인, 통일 고문을 비롯한 우리 사회 원로들에게 남북정상회담 결과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들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주한 외교사절을 비롯한 해외의 많은 고위 인사들이 찾아왔으며, 이들에게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자세하게 설명하며 남북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통일부 장관으로서 남북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이행하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남북장관급회담의 우리측 수석대표를 맡아 1차 회담부터 4차 회담까지를 이끌었다. 특히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북 당국 간 군사회담 개최 문제에 북측 대표단이 너무 소극적으로 나와서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오찬과 면담까지 지연시키면서 김정일 위원장 면담을 요구했다. 밤을 새워 김용순 대남비서와 함께 기차를 타고 자강도까지 달려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그와 조찬을 함께 하며 남북국방장관회담 개최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제주도에서 열렸던 제3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설치 등에 합의하고 한림공원에 ‘평화와 번영의 나무’를 전금진 북측 단장과 함께 심기도 했다. 제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북 경협의 기본이 되는 이른바 4대 경협합의서에 합의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한 동안 남북정상회담과 제1~4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치르며 남북관계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나름 노력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일념은 변함이 없었다. 2002년 KBS 교향악단 평양공연에 고문으로 동행 방북해 북한의 김용순 대남비서, 리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전금진 전남북장관급회담 북측단장 등을 만나 남북관계 현안에 대해 협의했다. 2004년에는 경남대 북한대학원 통일관 개관 행사 참석 등을 위해 리종혁 부위원장이 원동연 아태평화위 실장과 함께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 2005년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남북관계 정상화를 합의하는데 일조했으며, 2006년 5월에는 동북아 지역의 대학 총장들과 함께 개성공단을 방문해 국제심포지움을 개최하고, 한 달 뒤에 북한 조국통일연구원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간의 학술 교류 · 협력 합의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또한 냉전기의 쓰라린 상처 가운데 하나였던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인 작곡가 故윤이상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윤이상평화재단을 설립하고, 평양음악회를 개최했을 뿐 아니라 윤 선생의 미망인인 이수자 여사가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왔다. 평화통일의 길을 향한 일념의 여정을 해외에서도 인정했는지 2001년 미국 F.D.U.가 수여하는 글로벌 언더스탠딩 상을 수상했고, 2009년에는 프랑스판 평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라크재단의 분쟁방지 특별상을 수상했다.
2010년대 들어서도 대학의 극동문제연구소를 통해 북한 · 통일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많이 생산하는 동시에 국내외 연구기관들과 교류의 폭을 확대하며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깊이 있는 연구와 저변을 지속 확대해 나가고 있다. 2014-2015년 교육부의 CK 사업을 통해 통일안보 전문인재양성 사업과 2015년과 2018년에는 통일부와 함께 세계 주요국을 대상으로 한반도 국제포럼(KGF) 사업을 수행하여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전략과 대안을 모색하는 국제회의 개최와 남북관계 발전의 필요성과 중요성 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평화 전도사’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리고 2020년에는 ‘해외 북한·통일학 학술교류 지원사업’과 ‘지역통일교육센터’ 주관기관으로 선정되어 한반도 통일 및 북한 관련 해외 연구자의 저변을 넓히고, 지역 통일거버넌스를 구축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북한 · 평화통일분야 뿐만 아니라 국방산업, 스마트메카트로닉스융합산업, 로하스웰빙산업, 해양문화 · 도시힐링산업의 5대 특화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K-MOOC와 e-캠퍼스로 연계되어, 경남대학교 강의실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나는 평화통일을 향한 일념으로 한 길을 걸어온 외골수였다. 우리가 꿈꾼다고 다 이루어지진 않지만, 항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꿈을 이루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 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평화통일의 길을 향한 일념의 여정은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한 눈 팔지 않고 계속 갈 것이다.
황무지를 옥토로 바꾸기 위해 노력하는 농군의 심정으로 1973년 4월 미국 워싱턴에서 첫 한반도문제 국제학술회의를 개최하고, 북한 · 통일문제를 중심으로 동아시아와 한반도, 핵확산, 동남아, 해양 문제 등 당시에는 많은 이들이 엄두도 내지 못했던 주제들에 대해 국내외에서 국제학술회의, 세미나, 워크샵 등을 개최하며 많은 전문가들과 논의를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국내의 연구자들뿐 아니라 해외의 많은 국제정치 전문가들과의 교류를 바탕으로 저변을 확대할 수 있었다. 국제적인 냉전체제가 종말로 향하던 1986년, 당시 우리와 수교도 이뤄지지 않았던 중국을 방문해 한국 대학생들의 ‘공산권 체험 교육’ 프로그램을 합의하고 추진했다. 1989년에도 수교 이전이었던 소련에 들어가 ‘공산권 체험 교육’ 프로그램 실시 및 동방학연구소와의 MOU 체결 등을 성사시켰다. 주위에서 무모하다고 걱정하기도 했지만, 나는 이 과정이 평화통일로 가는 길이라고 믿으며 정면 돌파했다.
냉전체제 해체 후 소련, 중국 등과의 교류 · 협력을 확대하는 과정에서 전문가 양성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더욱 절감했으며, 1989년 국내에서 처음으로 북한학과를 경남대 행정대학원 내에 개설했다. 이를 모태로 1998년에는 국내 최초의 북한 전문 대학원인 경남대 북한대학원을 개설했다. 이는 다시 2004년 국내 최초의 북한 전문 ‘북한대학원대학교’로 승격 · 독립했다. 이를 통해 국내에서 ‘북한학’을 제대로 된 학문 분야로 자리매김시킬 수 있었다. 경남대 행정대학원 북한학과, 경남대 북한대학원, 북한대학원대학교 출신(석박사 학위취득자 668명, 통일미래최고위과정 3,185명, 통일경제아카데미 1,560명 배출)들이 현재 정· 관· 학계를 비롯한 우리 사회 곳곳에서 맡은 바 소임을 다하며 평화통일의 길을 함께 개척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1996년에는 경남대 개교 50주년 기념사업 가운데 하나로 일본에서 보관하고 있던 소위 ‘데라우치 문고’를 국내로 반환하는 사업을 추진해 큰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테라우치 문고는 2010년 문고 전체가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이 가운데 ‘기원첩’은 우리나라 보물 1682호로 지정되었다. 한일관계 개선은 학술 · 문화 교류라는 토대가 만들어지고 신뢰가 축적될 때 상호 어려운 역사 · 영토문제도 해결될 수 있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데라우치 문고의 반환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1998년에는 북한을 방문해 북한의 김책공업종합대학과 협력 의향서를 체결하고, 김일성종합대학을 방문해 교류 · 협력 문제를 논의했다. 이 모든 것이 남북관계 개선과 한반도 평화 정착, 평화통일로 가는 관문이라고 생각하며 지칠줄 모르고 뛰어다녔다.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이런 발걸음이 인정받았는지 김대중 정부에서 통일부 장관에 임명됐다.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을 총괄하는 통일부 장관으로서 무엇을 해야 하는지 깊이 고민했으며, 김대중 대통령이 강력한 의지를 갖고 있던 분단 이래 최초의 남북정상회담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는 것이 나의 소임을 다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에 반대하던 야당을 비롯해 우리 사회 각계각층의 주요 인사들을 만나며 화해 · 협력정책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설명하고, 남북정상회담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협조를 당부했다. 남북정상회담 준비를 위해 남북정상회담 추진위원장을 맡아 밤을 낮삼아 일하며 치밀하게 준비했다.
2000년 6월 13일, 김대중 대통령과 함께 평양으로 가는 비행기에 오르고, 평양 순안공항에 발걸음을 내디뎠던 순간의 감동을 아직 잊지 못하고 있다. 특히, 2000년 6월 14일 있었던 만찬에서는 김정일 위원장의 바로 옆 자리에 앉아 금강산관광, 이산가족 문제, 경의선 연결 문제 등에 관해 깊이 있는 대화를 나눴다. 2000년 6월 15일에는 당시 북한의 2인자이자 환송 오찬 주최자였던 조명록 총정치국장과 많은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북한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으로서 남북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이행하기 위한 조치에 착수했다. 전직 대통령과 3부 요인, 통일 고문을 비롯한 우리 사회 원로들에게 남북정상회담 결과 등을 자세하게 설명하고, 남북정상회담에서 합의한 사항들이 차질없이 진행되도록 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남북정상회담을 전후해 주한 외교사절을 비롯한 해외의 많은 고위 인사들이 찾아왔으며, 이들에게 김대중 정부의 대북정책을 자세하게 설명하며 남북협력의 중요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특히, 통일부 장관으로서 남북정상회담 합의사항을 이행하고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기 위한 남북장관급회담의 우리측 수석대표를 맡아 1차 회담부터 4차 회담까지를 이끌었다. 특히 제2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북 당국 간 군사회담 개최 문제에 북측 대표단이 너무 소극적으로 나와서 김영남 상임위원장과의 오찬과 면담까지 지연시키면서 김정일 위원장 면담을 요구했다. 밤을 새워 김용순 대남비서와 함께 기차를 타고 자강도까지 달려가 김정일 위원장을 만났다. 그와 조찬을 함께 하며 남북국방장관회담 개최에 대한 약속을 받아내는 성과를 거뒀다. 제주도에서 열렸던 제3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북경제협력추진위원회’ 설치 등에 합의하고 한림공원에 ‘평화와 번영의 나무’를 전금진 북측 단장과 함께 심기도 했다. 제4차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남북 경협의 기본이 되는 이른바 4대 경협합의서에 합의하는 성과를 올리기도 했다. 통일부 장관으로 재직한 동안 남북정상회담과 제1~4차 남북장관급회담을 치르며 남북관계를 새로운 수준으로 끌어올리기 위해 나름 노력하느라 시간이 어떻게 지나가는지도 몰랐다.
장관직에서 물러난 뒤에 다시 학교로 돌아왔지만,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통일로 가는 길에 보탬이 되고자 하는 일념은 변함이 없었다. 2002년 KBS 교향악단 평양공연에 고문으로 동행 방북해 북한의 김용순 대남비서, 리종혁 아태평화위 부위원장, 전금진 전남북장관급회담 북측단장 등을 만나 남북관계 현안에 대해 협의했다. 2004년에는 경남대 북한대학원 통일관 개관 행사 참석 등을 위해 리종혁 부위원장이 원동연 아태평화위 실장과 함께 서울에 다녀가기도 했다. 2005년 6.15 공동선언 5주년 기념행사를 위해 정부 대표단의 일원으로 평양을 방문해 김정일 위원장을 만나 남북관계 정상화를 합의하는데 일조했으며, 2006년 5월에는 동북아 지역의 대학 총장들과 함께 개성공단을 방문해 국제심포지움을 개최하고, 한 달 뒤에 북한 조국통일연구원과 경남대 극동문제연구소 간의 학술 교류 · 협력 합의서를 체결하기도 했다. 또한 냉전기의 쓰라린 상처 가운데 하나였던 동백림 사건의 피해자인 작곡가 故윤이상 선생의 명예회복을 위해 윤이상평화재단을 설립하고, 평양음악회를 개최했을 뿐 아니라 윤 선생의 미망인인 이수자 여사가 40년 만에 한국을 방문할 수 있도록 도왔다. 평화통일의 길을 향한 일념의 여정을 해외에서도 인정했는지 2001년 미국 F.D.U.가 수여하는 글로벌 언더스탠딩 상을 수상했고, 2009년에는 프랑스판 평화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라크재단의 분쟁방지 특별상을 수상했다.
2010년대 들어서도 대학의 극동문제연구소를 통해 북한 · 통일문제와 관련한 다양한 연구 결과를 많이 생산하는 동시에 국내외 연구기관들과 교류의 폭을 확대하며 한반도 문제와 관련된 깊이 있는 연구와 저변을 지속 확대해 나가고 있다. 2014-2015년 교육부의 CK 사업을 통해 통일안보 전문인재양성 사업과 2015년과 2018년에는 통일부와 함께 세계 주요국을 대상으로 한반도 국제포럼(KGF) 사업을 수행하여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전략과 대안을 모색하는 국제회의 개최와 남북관계 발전의 필요성과 중요성 등을 국내외에 널리 알리는 ‘평화 전도사’ 역할을 충실히 하였다. 그리고 2020년에는 ‘해외 북한·통일학 학술교류 지원사업’과 ‘지역통일교육센터’ 주관기관으로 선정되어 한반도 통일 및 북한 관련 해외 연구자의 저변을 넓히고, 지역 통일거버넌스를 구축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다하고 있다. 북한 · 평화통일분야 뿐만 아니라 국방산업, 스마트메카트로닉스융합산업, 로하스웰빙산업, 해양문화 · 도시힐링산업의 5대 특화교육에 역점을 두고 있으며, 특히 K-MOOC와 e-캠퍼스로 연계되어, 경남대학교 강의실은 24시간 불이 꺼지지 않고 있다.
지난 50년 동안 나는 평화통일을 향한 일념으로 한 길을 걸어온 외골수였다. 우리가 꿈꾼다고 다 이루어지진 않지만, 항시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꿈을 이루도록 해야겠다는 생각으로 뛰어 왔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최선을 다하면 이루어질 것이라고 믿는다. 나의 평화통일의 길을 향한 일념의 여정은 멈추지 않고 할 수 있는 데까지 한 눈 팔지 않고 계속 갈 것이다.
경남대학교 박 재 규 총장